상상하는 눈으로 그린 틈새-사이의 풍경
이문정(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모든 것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경이로운 것이 되거나 방해물이 될 수 있고, 모든 것이거나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고, 길이 되거나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어떤 것을 매번 다른 방법으로 본다는 건 대상을 새롭고 다양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러므로 관조하는 영혼은 고향 마을을 한 번도 떠나본 적 없어도 온 우주를 자기 뜻대로 품는다. _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책』
안수인은 풍경을 그린다. 그러나 회화적 행위의 주체인 작가의 시선에서 포착되는 외부의 경치나 상황을 그리는 풍경화는 아니다. 그보다는 작가의 일부가 포함되고 외부 세계가 주체의 일부로 들어온, 작가의 안과 밖의 세계 모두가 반영된 무언가―그 자체로 심리적 넓이와 깊이를 가진 특별한 공간―에 가깝다. 주체와 철저히 분리된 이질적인 외부 세계를 재현하는 게 최우선의 목적이 아닌, 몽상에 빠진 듯한 오묘한 풍경화는 심리적 공간을 세우기 위해 작가를 둘러싼 환경을 재료로 활용한다. 안수인에게는 무엇이든 풍경이 될 수 있는 잠재성을 갖는다. 응시와 관찰, 변형을 거친 종합적 화면은 예민함에 가까운 섬세함을 품고 있어 날카로운 긴장감을 유발한다. 작가가 태어나기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이 세상을 알고 싶은 순수한 욕망에 의식과 무의식을 포함한 정체성을 구조화하는 사회 시스템의 틈새를 발견하고 싶은 저항심이 더해진 결과이다. 작가는 자기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질문하는 동시에 문제를 제기했다.
처음에는 풍경을 이루는 구성 요소들에 집중했다. 시각적이고 감정적인 호기심으로 자기를 둘러싼 모두를 자세하고 꼼꼼하게 관찰한 뒤 화폭에 담았다. 생명체에서 시작해 사물로까지 확장된 하나하나의 존재와 그들 사이의 관계 그리고 틈이 눈에 들어왔다. 인간이 중심에 놓이지 않는 풍경 속 존재들에게서 느껴지는 에너지를 그리고 싶었다. 이를 위해 작가는 자연사 대백과사전 등을 비롯해 다양한 자료들을 수집하고 관찰했는데, 절대로 보이는 대로 옮겨 그리지 않았다. 언제나 자르거나 비틀고 뒤섞어 해체와 변용이 적극적으로 일어난 상태를 거쳤다. 온전한 혹은 온전하다고 믿어지는 이미지-이야기를 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계가 무너져 뒤섞인 존재(형상)들은 “인체 내부 장기들로 이뤄진 셸터(Shelter)”에 머무르며 외부가 포함된 내부를 보여준다.―<몸꽃>(2016), <꽃구>(2016), <몸꽃봉오리>(2017), <몸뚱아리집>(2017)― <물렁한 모서리>(2018), <움찔대는 풍경>(2018), <변형하는 상태에 관한 드로잉>(2019)에서는 인간의 장기와 같은 몸의 내부만을 상상하며 화면을 구성하기도 했다.
안수인의 작품에 담기는 몸은 주체가 “자신에게서 발견하는 특권적 대상”인 “나의 신체”도 아니고 타인이 보거나, 거울과 초상화를 통해 제공되거나, 예술에서 포착되는 “하나의 형태를 가진” 몸도 아니다. 그것은 “분할되어 뿔뿔이 해부되면서 비로소 인식”되는 “흩어진 부분과 단편으로 환원”된 몸이다. 스펀지, 항아리, 대롱 같은, 얇은 조각으로 돌아가는 몸은 “어느 것과도 닮지 않은 형상을 나타낸다.” 주체와 주체 외부 세계의 완벽한 분리가 불가능해지는 이 형상들은 보편적인 시공간의 조건을 넘어서 위치하며 실선의 경계를 점선으로 만들고, 상반된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서로 엉길 수 있게 한다. 괴물을 상상하기에 흥미를 느끼고 무서워지기보다는 마음이 편해지는 작가이기에 매력적인 괴물의 부분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화음과 불협화음이 동시에 들리는 것만 같다. 독립적이지만 연결되어 있는 각각의 형상들은 결코 통일된 하나의 전체가 될 수 없는 부분들이다. 부분이 여러 곳에 있듯 중심도 여러 곳에 있다.
이처럼 틈새를 만들어 안을 밖으로 빼내고 밖을 안으로 집어넣는 작품들은 안정적 세상에 살고 싶은 욕망과 사회화된 인간성을 벗어나고 싶은 반항심의 충돌로 인해 생기는 괴리감, 양가적 감정에 기인한다. “틈새 없는 세상에 사는” 자신과 “틈새를 계속 만들어내는 자신”, “오롯한 인간으로 살고 싶은 욕망”과 “보편적인 인간상을 배제하거나 포기하고 싶다는 욕망”은 늘 붙어 다닌다. 작가를 포함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계의 분류 체계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사회문화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계선의 안과 밖이 뒤섞이는 일도 가능하다. “머리 속에 구멍이 숭숭 뚫린 팬케이크 반죽 같은 뇌수가 머리를 앞뒤로 움직일 때마다 뭉글뭉글 이동한다.” 생물체처럼 보이지만 사회구성체를 상징하기도 하는 형상들은 그렇게 뒤집히고, 허물고, 만난다. 물론 상상 없이는 불가능한 작품이다. 다만 작가는 자신이 실제로 본 것을 토대로, 본 만큼 상상하려 노력한다. 현실에 대한 깊은 이해를 시도한 결과물이 안수인의 작품들이다. 작가에게 상상의 이미지는 거짓이나 허구가 아니라 현실의 재구성에 가깝다. 그의 작품은 세상에 없는 존재를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현실 또는 일상을 토대로 등장하는 꿈이나 무의식, 환상이 모호하게 혼재되어 있는 시공간이다. 경계가 흐릿해진 비고정적이고 가변적인 상태의 존재들은 멈추지 않고 화폭 위를 흐른다. 한편 <데이 바이 데이(Day by Day)>(2021)에서는 자신이 먹었던 “음식 사진들을 매일 수행적으로” 그렸는데, 이 역시 몸의 구멍을 통한 안과 밖의 연결이라는 측면에서 앞선 작품들과 연결된다.
결과적으로 친숙한 몸으로 대표되는 확고하고 안정적인 정체성을 벗어나 경계가 사라진 채 유동체처럼 뒤엉킨 식물, 동물, 사물의 몸은 자유롭고 새로운 정체성을 위한 의도적 낯섦, 숨통을 트이게 하는 틈새의 상징으로 작동한다. <희미함에서 시작한 것들>(2020), <둥실 떠 있는 노란 돌기>(2020), <겹침에 대하여>(2020) 등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안수인의 작품에서는 완전무결한 몸(자아) 그리고 확고한 전체로서의 정체성 대신 어떤 이질적 요소와도 결합할 수 있는 열린 몸-풍경이 주인공이 된다. 흔들리는 경계와 왜곡된 형상들은 경직과 억압을 벗어나는 편안한 불안이라는 모순적 만족을 불러온다. 풍경 밖에 자리하던 응시와 재현의 주체(작가)가 풍경 속 요소들과 뒤엉키고 관계 맺으며 그 자신도 풍경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안수인의 방식으로 사고하면, 무한한 권력을 가진 채 통제력을 행사하는 주체가 풍경 밖에 위치하는 상황은 제외되고 지워짐에 가깝다. 작가는 풍경에 들어가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을 응시한다. 시선의 주체이자 시선의 대상이 되는 양가성을 제공하는 풍경화다.
이러한 정조는 최근작에서도 유지된다. 변화가 있다면 입체적인 이야기의 생성을 위해 하나하나의 구성 요소들보다는 그것들이 결합해 만들어내는 풍경 전체로 시선을 돌리게 되었고, 추상적 형상의 비중이 늘었다는 점이다. 안수인의 풍경화는 분명 미술에 관한 고정 관념과 규범, 나아가 사회문화적 시스템이 구성하고 제한하는 인간의 경험과 사고에 대한 성찰에 근거한다. 따라서 작가에게 추상화된 풍경이란 형식적인 실험에 집중함이 아니라 정돈된 선명함이 가져다주는 안정감을 위해 포기해야 했던 것들을 소환하는 상상-가능성의 여지가 커졌음을 의미한다. 입체감과 원근감이 약해진 표현 방식 역시 회화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함이라기보다 틈새가 끝없이 발견되는 남다른 공간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평평해서 무한할 수 있고, 평평하기에 하늘을 닮을 수 있다. <넌 막혀 버렸고, 터져 나올 수 없어>(2022), <나의 손끝을 스치는>(2024), <그래도 나는 너를>(2024)이 보여주듯 작은 틈을 만들어 공고한 세계에 균열을 일으키려는 노력이다. 인간(작가)이 세계 속 다른 존재들에게 내민 손에 생긴 구멍에서는 불씨가 피어오르고 새싹이 자라난다. 여기에는 당연시되는 것을 슬며시 비켜 가고 싶은 욕망, 어긋나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무언가에 “휩쓸리지 않도록” 노력하지 않고 싶었다. 그리고 “공간 자체로 충분한 그림”, “혼자 작동하면서 무언가를 구축하고 있는” 작품, “납작과 뾰족”이 결합된 “이도 저도 아닌” “머물러 있는 상태”, “뭉툭하지만 아슬한”, “터질 듯 안 터질 듯한”, 매끄럽지 않고 “까슬까슬한 상태”를 향하길 원했다. 구성 요소들 사이의 자유로운 만남을 추구한 결과물은 일시적인 에포케(epoché)를 발생시킨다. 응시-인식-사유의 확장과 전환을 위한 잠시간의 멈춤이자 쉬어감이다.
한편 <우뚝 솟아있는 검정>(2024), <나는 그 덩어리를 산이라 부르기로 했다>(2024), <그 사이로 보이는 땅>(2024)처럼 최근작으로 올수록 안수인은 익숙함과 낯섦이 공존하는 기묘한 풍경화를 완성하게 되었다. 자유롭지만 인위적이기도 한 오묘한 형상들이 만난다. 상투적이라 느껴질 정도로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첫인상의 풍경은 뜯어볼수록 비현실적이다.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세계 혹은 나 자신이 가장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이 담긴, 논리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풍경이다. 주체(작가)의 내면이 더해져서일 것이다. 전술했듯 안수인의 시선은 명확한 의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세상만을 향하지 않는다. 어찌 되었든 작품들은 분명 작가가 느꼈을 ―나직하게 흐르는 설렘, 불안, 떨림 그리고 안온을 닮은―어떤 기분을 선사한다. 변화와 생성의 에너지뿐 아니라 심리적 예민함과 긴장감, 나아가 멜랑콜리(melancholy)의 정서까지 끌어낸다. 세상에 던져진 주체의 복잡다단한 마음이 담긴 논리적으로 한정 짓기 어려운, 해독하기도 모호한 분위기에 잠식당한 풍경이다. 장조와 단조가 뒤섞인 풍경화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며 내밀한 것이라 믿어지는 기분은 그렇게 공유된다.
이 세상에 닫히고 멈춘 것은 없다. 회오리(움직임)를 품은 돌은 구르고 부유한다. 구멍이 뚫린 산과 땅, 돌 안에는 또 다른 세상(존재)이 담긴다. 세상의 바탕인 대지는 부드럽게 뒤집히고, 흔들리고, 오려져 정지된 하나를 벗어난 부분이 된다.―<오려진 땅조각>(2020), <그 돌이 구르는 모양 시리즈>(2022), <맞붙어버린 풍경 사이로 빼꼼 보이는 너의 모습들>(2022)― 억압된 것의 폭발적인 귀환은 아니다. 그보다는 정적인 흔들림이다. 작가는 세상 그리고 작품과 심리적 수평선―거리감―을 유지하며 고요한 저항을 꿈꾼다. <등성이 너머의 그곳>(2024)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벽으로 막혀 있는 산은 <산 가로지르기>(2024)에서 벽의 틈새에 구멍을 내고 이탈한다. 벽의 일부는 사라진다. <나는 그 덩어리를 산이라 부르기로 했다>의 산은 공고하지만 반투명하다. 아무리 거대한 덩어리라도 산과 산 사이에는 틈새가 생긴다. <흐릿해져 보려는 돌_그 돌이 구르는 모양 시리즈>(2022)의 돌은 구름을 닮았다. 산은 털로 뒤덮이고 해의 털은 날리며 하늘은 매일 변한다.
이제 작가는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 사이를 넘나든다. 가시성의 세계와 비가시성의 세계에 틈을 만들어 서로의 영역을 침범시킨다. 사회를 관찰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안정적인 감각이라 믿어지는 시각에 부여된 권력은 약해지고, 보기를 규제하는 규범은 모호해진다. 이 세상은 인간에게 자신의 모두를 보여주지 않는다. 또한 인간의 믿음과 달리 시각은 객관적이지 않으며 불완전하다. 모든 형상은 눈에 맺히는 바로 그 순간부터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것으로 변한다. 투명하게 보기란 불가능하다. “등성이 너머의 그곳”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다. 분리할 수 있다고 믿어졌던 자연과 인공의 영역조차 정체를 숨긴다. 그 내부를 파악할 수 없는 검정의 세계는 우뚝 솟아오른다. <그 사이로 보이는 땅>(2024)의 깊고 심오한 검정은 산일 수도, 땅일 수도 있다. 어쩌면 물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인간이 판단한 세계는 인간의 주관적 상상 속에서 끼워 맞춰진 허구에 가깝다. 인간을 둘러싼 물리적 세계는 개인의 지각, 감성, 인격과 만나며 굴절된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자기만의 다른 세계(관)를 갖게 된다. 인간의 눈에 맺힌 세상은 주체의 반영일 뿐이다. 따라서 자기 안을 들여다봐야 밖을 볼 수 있고, 온전히 볼 수 없음을 받아들여야만 인식의 확장을 이뤄낼 수 있다. 이에 작가는 가림으로써 드러내기를 시도한다. <푸른 더미가 남긴 기억들>(2021), <그 안에 감춰진 것은>(2021), <더미의 배꼽>(2022)에서 무언가를 덮은 천은 모든 것을 선명하게 규정할 수 있다는 인간적 믿음의 허망함을 드러내는 동시에 ―역설적이지만―인간의 사유를 가린 장막을 걷어 낸다. “드러나지 않아야 드러나는 순간들”이 있다.
일상적인 인식의 안과 밖을 넘나들 수 있는 통로가 바로 예술이기에 안수인은 상상하는 눈으로 보고 그린다. 상상력이 발휘되는 세상에서는 작가가 하나의 표현을 제시하면 곧이어 또 다른 하나의 표현이 필요해진다. 고정된 화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존재의 본질과 원리를 사유하기는 산만하게 흩어져 있어야 한다. 일부에게 주어지는 “특권적인 명증”을 향한 믿음은 지워져야 한다. 안수인의 풍경은 세상을 “친숙성과 안정성으로부터 끌어내어, 보다 낯선 어떤 것”, “경이로운 것과 관련된 영역에 더 가까운 비개연성의 세계”로 전환시킨다. <더미의 배꼽>(2022)에서 방수포 사이로 나타난 무지개처럼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실존적인 불안 및 불편함과 관련”된 이 “환상적 서사는 경이로운 것과 모방적인 것”이라는 두 요소의 혼합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사실주의적 관습에 의존하면서도 그것을 깨뜨린다. 현실을 벗어나지 않지만, 현실에 머무르지도 않는다. 익숙함이 낯섦으로 바뀌고 상대성이 힘을 발휘하며 “뭉게뭉게” 그 모습을 드러낼 때 “사이로 보이는” 과정 중의 이야기는 쌓아 올려지는 동시에 흩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