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나는 그 덩어리를 산이라 부르기로 했다》

아티스트 토크 _ 2024.10.26 진행 (요약본)


작가: 안수인

모더레이터: 고윤정

패널: 이문정(리포에틱 연구소), 홍예지(미술비평)

 

※ 본문에서 발화자는 고, 안, 이, 홍 이라 표기하였습니다.

 




작업에서의 변화

 

고: 과거의 작품과 이번 전시 참여 작품들이 어떻게 변화됐는지 궁금합니다.

 

안: 내 안에 확실하다고 여겼던 기준이나 답에 대해서 항상 재고해 봐요. 그 과정이 전체 작업을 이루는 중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명확해 보이는 기준의 틈을 찾아 시각적으로 더 벌려보고자 하는 시도를 주로 하고 있어요.

처음에 관심을 가졌던 것 중 하나는 사람의 신체와 생명체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과 인간이 아닌 나머지 생명체로 자연스럽게 구분을 하였고, 인간과 동식물이 같은 생명체군에 있다고 했지만 철저히 다른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에 괴리감, 불편함을 느꼈어요. 초반에는 흔히 보기 힘든 동식물이나 세포들,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를 찾아서 그려보려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내부 구조, 뼈나 장기 같은 것들로 생명체들이 살 수 있는 쉘터나 집과 같은 공간을 만들어주고, 그 안에서 날씨, 환경, 위치적인 이유 때문에 현실에서는 공생할 수 없는 동식물들이 함께 사는 가상의 세계를 만들었어요. 현재는 스토리텔링보다는 화면 자체를 조형적으로 구성하는 것에 보다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특정하게 자연물을 다루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고, 산, 땅, 하늘, 해, 구름과 같이 늘 경험하는 자연물을 낯설게 바라보는 태도를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풍경’이 가진 의미, ‘자연물’의 대상화

 

고: 이번 전시는 풍경과 관련이 있다고 하셨는데요. 작가님에게 풍경은 어떤 의미인지 얘기해 주면 좋겠어요.

 

안: ‘풍경’보다는 ‘풍경화’에 대한 생각을 먼저 했습니다. 땅과 산이 있고, 해가 떠 있는 그림을 반복적으로 그렸는데, 그러다보니 패턴이 생겼어요. 어느 순간 실제로 보이는 진짜 산, 해, 하늘, 땅 같은 것들은 내가 그리고 있는 것이랑 다르다고 느꼈습니다. 그렇게 괴리감을 느끼면서 내가 산이라고 생각한 것이 진짜 산이 맞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렇게 작업을 할수록 풍경화에 대한 어려움이 더욱 커졌어요. 그래서 이번에는 다시 그 태도에서 출발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연물’은 제가 갖고 있는 습관적으로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 보통 ‘외부세계를 그려낸 무언가’를 풍경화라고 하는데, 작가는 안에 있는 것을 꺼내서 그걸 바깥으로 보여주고, 또 계속 안으로 침잠하는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작가노트, 인터뷰 때에 명쾌한데 흐릿한, ‘안정적인 상황’과 ‘불안정적인 상황’을 계속 왔다갔다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작업에서의 풍경도 외적인 요소들과 안의 무언가가 섞여 있어요. 다가가고 싶지만 다가갈 수 없고, 작품을 보더라도 수평선의 일정 거리를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풍경화의 요소를 갖고 있지만 거리감, 공간감도 깨지고, 구체적인 자연물의 특징도 깨져요. 추상화된 것처럼 보이지만 또 하나의 강력한 관습으로서의 모더니즘이 아니라 단순화를 통한 상상의 확장처럼 보입니다.

또한 관습과 시스템 안에서 온전하고 완벽한 인물로서 행복하게 잘 머물고 싶은 욕구와 시스템을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왔다 갔다 하는 것처럼 느껴져요. 안식처 같은 공간에 생명체가 들어가 있는데, 그 안식처가 사실 전통적인 사회에서 안정적이지 않은, 그러니까 ‘완전한 인간’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몸의 내부예요. 일반적으로 이러한 주제가 담론이나 사회적 이야기와 연결이 되는데, 오히려 더 안으로 들어가요.

 

고: 두 선생님은 글을 쓸 때 언어를 섬세하게 다루시잖아요. ‘풍경’이나, ‘추상’과 같은 개념이 큰 단어를 작가의 작업 안에서 어떻게 해석하시는지 궁금합니다.

 

홍: 작업과정이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작가가 그리는 것은 사실 ‘인식 과정 자체라는 생각을 했어요. 우리가 바깥 세상에 있는 대상을 인식할 때, 변화무쌍하고 감성적인 감각 데이터들을 실시간으로 받아들이게 되는데요. 감각의 데이터로만 있는 게 아니라 이성의 인도를 받아서 선험적으로 가지고 있는 경험과 함께 인지를 하게 되어요. 감각 데이터라는 불특정한 반죽 덩어리를 ’산‘과 같은 개념의 카테고리를 가지고 와서 틀을 찍어내 이건 ’산 모양의 쿠키다‘라고 인식을 해야만 실시간으로 바뀌고 있는 이 모호한 형태가 틀에 꽂혀져 ’산‘이라고 인지가 되는 거예요. 작가는 덩어리 반죽들이 틀에 찍혀져서 나오는 그 과정 자체를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본래 ‘개념’은 세상과 관계 맺게 하는 유용한 도구이지만, 한편으로는 폭력적이기도 하다. 우리는 틀을 찍고 있지만 그 고정된 틀을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는 ‘개념’ 이라는 매개 없이 ‘산’이라 부를 있는 반죽 덩어리를 곧바로 받아들기는 어려워요. 그러니까 우리가 인간인 이상 틀을 찍는 행위를 멈출 수는 없는데, 최대한 반성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작가에게는 ‘나는 이걸 산이라고 생각해 왔고, 산이라고 생각하며 그리고 있는데, 진짜 산이라는 건 이게 아니다’라는 괴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여기에서 주목하는 것은 모호하고 변화하면서 미끄러지는 데이터들입니다. 작가는 나의 내면세계가 바깥 세계에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긴장과 상대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멈출 수 없는데, 언제나 불완전한 이해일 수밖에 없는 그 상황을 계속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작가가 인식 과정 자체를 그리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고, <나는 이 그 덩어리를 산이라 부르기로 했다> 제목에서도 그것이 느껴졌습니다. 너는 산이 아닐 수도 있는 가능성은 여전하고 불완전하지만, 동시에 난 널 이해하고 싶고, 너를 내 안에 들여오고 싶으며, 그 과정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긴장이 느껴집니다. 어쩌면 산이라 부르기도 포기하고 싶었을 텐데 그럼에도 ‘산이라 부르기로 했다’라고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확실히 ‘내가 너를 완전히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있는가’, ‘그거 불가능한데’라는 그런 회의감을 딛고 ‘그럼에도 부르기로 했다’라는 것까지도 느껴집니다. 화면 자체가 계속 열려 있는 점이 재미있어요.

작가의 그림에서 ‘추상성’은 기하학적인 추상이 아닙니다. 우리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인식 과정 자체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추상적인 과정’, ‘추상화 과정’, ‘개념화 과정’을 보여주고 있고, 이 도형들은 명확하게 몇 cm, 몇 기울기라고 말할 수 없는 모호함을 계속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에 ‘산’을 제주로 한 것은 굉장히 직관적이고, 본능적으로 똑똑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산’이라는 걸로 표현되는 각종 ‘자연물’들이야말로 인간의 이성의 한계를 계속 시험하는 대상들이기 때문입니다. 불편하기도 하고, 쾌가 느껴지기도 하는 감정까지 불러일으키는 대표적인 대상물이 자연이기 때문에 작업을 인식 과정으로 읽는다면 이것이 산인 것도 너무 자연스러워요. ‘자연’은 더 틀짓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런 과정을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선택입니다.

 

이: 예술가의 존재가 그런 과정 중에 위치한다는 것은 상당히 의미 있어요.. 예술가는 항상 사회 안에 함몰되지 않으면서도 경계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그렇다고 완벽히 나가버리면 소통이 안되기 때문에 무의미한 발화가 되지요. 그래서 계속 왔다갔다하고, 예술가 스스로도 자신들이 그걸 잘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예술가들이 결과물을 만들었을 때, 그 결과물은 사회 안으로 들어와서 다시 ‘산’으로 규정됩니다. 규정된 언어로서 다시 한 번 평가를 받고, 분석, 언어화되고 그 과정을 계속 왔다갔다하는 게, 모순적이면서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안에 있어야 되고, 밖에도 있어야 되는 존재가 예술가인 것 같아요.

작업이 최근작으로 올수록 추상적인 면이 있습니다. <우뚝 솟아있는 검정>(2024)의 경우에는 형태가 단순해지다보니 이 검정이 산일 수도 있지만, 물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하늘일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고, 단단함과 유동적인 느낌이 함께 보이기도 했어요. 납작함의 경우도 플라스틱에서만 볼 수 있는 납작함인데, 역으로 더 납작해지니까 깊이감이 없어서 오히려 더 깊이를 알 수 없는 상황처럼 느껴져요. 그런 점에서 결과를 열어놓는 작업의 방향이 유동체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변신액체괴물 같은 느낌도 들었어요. 자연은 아주 ‘자연스럽다’의 자연인데, 이미 내가 눈으로 보는 순간 자연스럽지 않고 주관적이고 아주 인간적인 무언가가 되어버리는 때문이에요. 작가가 자연을 선택한 것은 양가적입니다. 보는 순간 내 마음대로 한정이 되어버리고, 그걸 극단적으로 보여주지만 그럼으로써 다 열어버리기도 하는 그런 면이 있습니다.

 


안과 밖, 경계

 

고: ‘안과 밖’, ‘경계’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야 할 것 같은데요. 인터뷰할 때 작가님의 과거 작업을 보니까 신체 장기 작업이 굉장히 많더라고요. 요즘 작업에서도 경계라는 부분, 장기의 내부와 외부가 왔다 갔다 하는 부분, 혹은 엄청나게 매트하다가도 갑자기 불현듯 훅 찢기거나 불타오르는 이미지들이 등장하는 부분들이 보이더라고요.

 

안: 페인팅을 하면서 생긴 습관이나 패턴이 있는데, 처음에는 못 느끼고 무아지경으로 작업을 하다가 갑자기 그게 불편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익숙한 색깔이었다가, 한순간 받아들여지지 않고, 평소 익숙했던 것과 충돌할 수 있는 조합에 관해 생각해요. 저는 규칙이 생기는 것을 지양하고, 규칙을 발견하면 ‘계속 똑같은 짓을 반복하는 사람이었어?’라고 내 스스로를 자책하기도 해요.

이전의 작업에서는 대상이 중요했어요. 대상에 집중하기 위해서 주변의 공간을 훨씬 무한한 빈 공간으로 내버려두고, 대상을 통해 공간을 상상할 수 있게 하는 방식을 시도해보려는 생각이 강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어떤 대상을 그리더라도 그 대상이 놓이는 공간이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이번 작업에서는 공간을 많이 고려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가로막힌 벽 같은 것을 나의 방이거나 어떤 건물의 내벽과 같은 실내 공간이라고 생각했어요. 사람이 구축해놓은 인공적인 공간에 산이나 해 같은 것들이 놓일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오히려 말도 안되는 상황들을 상상의 촉발제처럼 사용하였어요. 마치 인간의 장기로 공간을 만들어 놓고 그곳에 타 생명체들을 막 넣어 보는 것과 비슷하게 이 실내공간에는 ‘산과 같은 자연물이 어떻게 놓여 있을까’ 혹은 ‘어떤 상황일까’ 하는 상상을 해보는 거죠. ‘이 산은 어떤 마음일까’ 의인화하기도 하고요.

 


단어를 고르기

 

고: 작가님이 제목이나 작가노트 같은 것들을 쓰면서 단어를 고르고 매칭하는 시간이 오래 걸리시더라고요. 사실은 제게는 작가노트가 떠다니는 구름 같은 느낌이어서 작업과 끊임없이 교차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안: 사실 이 작업이 어떤 작업이다 명확하게 말하기를 요구 받는 상황에서 뚜렷한 표현을 언어로 고르기는 어렵습니다.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것들을 계속 치열하게 작품으로 만들면서도, 작품을 언어화 할 때는 ‘내가 이 단어를 작업을 설명할 때 써도 될까’라는 우려와 조심스러움 같은 것들이 많이 생겨요.

 

이: ‘미술’은 언어적 한계로 인해 말로 표현 못하는 것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미술이라는 것 자체가 우리가 안 가봤던 경계를 얘기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그 경계를 넘나들면서 확장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장르가 미술이고, 굳이 언어로 이야기를 한다면 시가 그래도 가장 그 경계를 오갈 수 있는 장르라고 할 수 있어요. 안수인의 작가노트는 시와 같은 느낌이 들어요. 비논리적인 부분도 있고, 명확하게 한정되지 않고, 의도적으로 맞춤법을 벗어나게 사용하기도 해요. 의식적으로 결론을 열어 놓으려고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실제로 작가가 작가노트를 쓸 때 한 글자, 한 글자 쓰는 것이 편하지 않았겠구나 생각했어요.

초기 작업에서 인간의 신체가 안과 밖이 뒤집힌 듯한 상황을 표현하신 걸 볼 수 있는데, 사실 나랑 제일 가깝지만 잘 모르는 세계가 내장이잖아요. 그리고 한편으로 우리의 육체가 물리적으로는 경계가 명확하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몸에도 틈이 있죠. 눈, 코, 입, 항문 아니면 땀구멍과 같은 틈이 있는데 우리는 말끔한 실루엣에 완전무결한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인간의 정체성을 만들어요. 그러한 사고를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 시도라고도 할 수 있어요.

그래서 거울을 통해서 보는 명확한 나도 아니고, 타인이 인식하는 나도 아니고, 자화상도 완전히 아니에요. 하지만 분명히 인간의 어떤 모습이자 작가의 일부죠. 그래서 작업 스타일은 계속 바뀌지만 꾸준히 경계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글을 쓸 때 어떤 과정으로 쓰시는지 궁금해요. 무심한 듯 툭툭 쓴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 그렇지 않은 글처럼 보였어요.

 

안: 제목을 짓는 과정은 작업 이미지를 만드는 과정과 비슷해요. 드로잉을 하는 것처럼 평소에 짧은 문장과 긴 글, 이렇게 두 가지를 나누어서 기록을 해요. 글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를 작업화 할 때도 있고, 먼저 이미지를 만들고 나서 맞는 문장들을 고르고, 재조합하며 찾아가는 방식으로 진행할 때도 있습니다. 제목을 지을 때, 개념적으로 다가오기보다는 좀 더 움직임이나 상황을 상상할 수 있게 하는 언어를 고르려고 노력해요. 제목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상상의 도화선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의성어, 의태어와 같이 움직임이나 이미지를 연상하는 단어 위주로 구성하려고 노력합니다.

 

홍; 시인들이 쓰는 시어가 사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단어지만 단어와 단어가 연결되면서 우리가 그 단어를 쓸 때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상상력을 제공하고, 심상이 미끄러지면서 움직이는 걸 느끼게 됩니다. 작가님께서 그림을 그리고 그림에 맞는 단어를 고르는 과정도 시인이 시어를 고르고 묶어내는 과정과 닮았어요. 제목에 쓰인 단어들도 어려운 내용이 아니고, 감각적인 시어가 많이 쓰여요. 우리가 다 아는 단어인데 흔히 쓰는 맥락으로 가져다가 붙일 때, 그 뜻으로 읽히지 않는 여지를 계속 열어주면서 어렵지만 매력적인 길로 계속 유도하는 것 같아요.

이전 작업에서는 대상 자체가 중요했고 대상에 강조점을 두다보니 배경은 뒷전이 되는데, 최근에 와서 그 대상이 모인 공간이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다른 의미로 말하면 ‘맥락’인데, 대상 자체가 의미 있는 게 아니라 대상이 놓여있는 맥락 자체를 다루고 싶어 하는 것처럼 느껴져요. 일상적인 단어를 흔히 쓰는 맥락에 자연스럽게 쓰는 방식이 아니라 ‘시’라는 어떤 장면 안에서 똑같은 단어를 이질적인 맥락에 놓고 작품 제목과 이야기를 붙여 나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위적인 공간 안에 산이 들어와 있다거나 우리가 기대하는 제목을 붙여 주지 않고, 다른 여지가 있는 단어들을 붙이면서 다른 맥락에서 경험할 수 있게끔 계속 시도하고 있는 거죠.

 


색에 관하여

 

고: 작업에서 채도 높은 색이 많이 보여요. 이렇게 쨍한 색을 쓰게 된 이유가 있는지 궁금해요.

 

안: 쨍한 색은 개인적으로 중요하기도 하고, 물감으로 사용하고 있는 아크릴과도 연관이 있어요. 쨍한 색일수록 인위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림을 그릴 때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것보다 인위적으로 보이거나 플라스틱같이 보일 수 있는 방향을 고민해요. 아크릴 물감의 주된 성분이 합성수지여서 여러 겹의 아주 얇은 필름이 겹쳐지는 것 같은 질감이 만들어집니다. 여러 층이 쌓일수록 훨씬 플라스틱 같은 인위적인 깊이가 생기죠. 자연물을 인위적으로 그리고 싶은 마음은 지속적으로 이야기했던 안정적이기도 하면서 벗어나고 싶기도 하는 그 티키타카 중의 일부이지 않을까 해요.

그리고 색면을 배치할 때 색끼리 충돌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요. 개인적으로 나의 그림을 검열하면서 어떤 게 유치하고 자연스러운지 고민을 했던 시기가 있어요. 그런데 지금은 보통의 자연스러운 색조합이 떠오르더라도 오히려 더 충돌할 법한 색을 함께 두는 선택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이번 전시에서도 산과 하늘 태양을 그릴 때, 전에는 절대 쓰지 않았을 초록색, 파란색, 황토색을 함께 썼어요.

 


예민함에 가까운 섬세함

 

고: 마지막으로 이문정 선생님이 평론에서도 얘기해 주신 작가가 가지고 있는 ‘예민함’에 관한 얘기를 나눠보면 좋을 것 같아요.

 

이: 평론 중 ‘예민함에 가까운 섬세함’이라는 문구를 썼는데, 작업에서 미묘하게 히스테리컬한 부분이 있다고 느꼈어요.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뜻이라 아직 명확한 답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예민한 구석이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확실한데, 이것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홍: 작가 노트와 자료를 읽다가 갑자기 그 안에서 제 감정이 터져버렸어요. 이것은 저도 히스테릭한 부분이 있어서 그럴 수도 있는데요. 작가 노트에 ‘나’와 ‘타자’라는 말이 나오는데, 다시 저를 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최근에 굉장히 갖고 싶고, 만지고 싶고, 깊숙이 침투해서 하나가 되고 싶은 미스테리한 인물을 알게 되었는데요. 그 사람과 섞이고 싶지만 그걸 느낀 순간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대상에 대해서 느끼는 것이 사랑인지 모르겠지만, 나의 경계와 그 사람의 경계가 무너지고 위태로워지고, 어쨌든 섞여보고 그러다 다시 내 경계를 뚜렷하게 구분 짓기 시작하는 이 과정을 겪어야만 사랑이란 것을 하는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분명 깊은 곳에서 그 모험을 감행하고 싶으면서고 그게 강렬한 만큼 기존의 나의 경계를 지키고 싶었어요. 작가노트 중 나와 너의 기준이 명확한데, 영역이라는 걸 말하는 순간 침범당할 것 같은 불안함에 대해 말하셨는데요. 그 불안함을 저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작가가 영역과 불안함에 대한 충동을 갖고 있다면 그런 것이 히스테릭일 수도 있겠네요. 제 감정을 폭발하게 했던 작품 중 하나가 <손 연작>(2024)인데요. 침범당하길 원하고 동시에 너무 보호받길 원하는 예민한 내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작가님이 대상들을 그렇게 예민하게 느끼고 계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푸른 더미가 남긴 기억들>(2021)이라는 작업에 탁 꽂혀서 흐르는 피 같은 묘사가 있어요. 피가 폭발한 것도 아니고, 스물스물 흐르는데 저는 그게 더 아픈 거예요. 이 산이 박살나는 것보다 경계 틈으로 미세하게 흐르는 표현이 더 아려요. 작품은 결국 ‘관계’에 대한 이야기 같아요. 어쩌면 우리는 모두 경계하는 동시에 뒤섞이고 싶은 양가적인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손연작>(2024)에서도 평면적인 손이 입체적인 것처럼 보이는 무언가와 함께 등장하는 게 아슬아슬하고 안타까워요. 유령처럼 그대상이 잘 잡히지 않고 아리게 느껴져요.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아요. 저도 작업을 보면서 계속 납작하게 미끌려서 가요.

‘예민한 섬세함’을 가진 작가에게 만약에 정말 산이 이렇게 느껴진다면 사실 좀 고독하게도 느껴졌어요. 그래서 이런 양가적인 특징을 히스테릭하다고 부를 수 있다면 그런 의미로도 말할 수 있을 것 같고, 자아의 경계, 정신분석적 맥락에서도 살펴볼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