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같지 않은 너와 함께하기를
홍예지 (미술비평가)
어떻게 덩어리가 산이 될 수 있는가? 지금 눈앞에 펼쳐진 장면들은 계속해서 움직이는 과정처럼 느껴진다. 안수인이 그리고 있는 것은 바깥 세상의 풍경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는 인식 과정이다. 인간은 바깥 세상에 있는 대상을 인식할 때 감성 능력을 통해 감각 데이터들을 받아들인다. 그런데 감성의 데이터만으로는 ‘이것은 무엇이다’라고 바로 인식할 수 없다. 우리가 선험적으로 가지고 있는 개념 틀을 가지고 와서 불특정한 감각 데이터를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형식으로 변환해야 한다. 예를 들어 창문 너머로 산을 본다고 하자. 산의 능선이 뿌옇게 겹쳐 보이고, 녹색인지 푸른색인지 검은색인지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색들이 섞여 있다. 일차적으로 감성을 통해 받아들인 산의 모습이 내면의 테이블에 쿠키 반죽처럼 놓인다. 아직은 이 반죽 덩어리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어떤 형태로 굳어질지 모른다. 잠시 후 쿠키 틀을 가지고 와서 반죽 덩어리를 찍어 낸다. 산 모양의 쿠키가 만들어진다. 쿠키를 포장하고 ‘산’이라는 라벨을 붙인다. ‘산’ 쿠키들이 차곡차곡 정리된 찬장에 쿠키를 보관한다. 변화무쌍한 덩어리가 산으로 분류되기까지, 우리의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과정이 이와 같다.
이번 전시의 표제작이기도 한 <나는 그 덩어리를 산이라 부르기로 했다.>는 작가의 관심이 산이라는 자연물이 아니라 산을 산으로 인식하는(산이라 부르는) 과정에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x, y, z축이 교차하는 3차원 공간에 어정쩡하게 놓여 있는, 몽실몽실한 초록빛 덩어리는 실재하는 산처럼 보이지 않는다. 반대로 완전히 관념적인 산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우리가 ‘산’ 하면 자동적으로 떠올리는 기하학적인 삼각형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묘하게 둥글린 윤곽선과 짐승의 털처럼 물결치는 곡선은 이 덩어리가 어떤 엄격한 분류에도 들어맞지 않을 거라고 말해 준다. 뭐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상태의 무엇. 모호하고 불분명한 무엇. 이 덩어리는 관람객의 내면 공간에 미끄러져 들어와 인식 체계를 자극하고 활성화한다. 관람객이 이 그림을 보는 동안 경험하는 일련의 작용은 한때 작가의 내면에서 일어났던 과정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안수인이 그린 것은 그가 본 산이 아니고, 그가 생각하는 개념적인 산도 아니다. 그보다는, 우연히 마주친 감각 데이터의 집합이 어떻게 산으로 인식되고 산이라 불리게 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이다.
나는 매번 다른 것을 보고 있음에도 동일하게 ‘산’이라 부르고 넘어갔다. 여태까지는 이렇게 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안수인의 그림을 보기 전까지는. 찌그러진 산을 보든 뾰족한 산을 보든 완만한 산을 보든 나에게는 그냥 다 같은 산이었고 여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게 산이라고 생각해 두면 편했고, 더 이상 그 문제에 관심을 쏟을 필요도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기 바빴으니까. ‘산’이라는 개념을 비롯해 모든 개념은 이런 편의성과 유용성을 갖는다. 시시각각 변하는 대상들에 일일이 초점을 맞추며 살아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우리의 에너지와 감각의 수용 범위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에게 보편적인 개념이 없어서, 무언가를 마주칠 때마다 매번 새롭게 이해해야 한다면 정신적으로 굉장히 힘들 것이다. 나중엔 미쳐 버릴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개념은 인간이 정상적으로 바깥 세상과 관계 맺기 위해 꼭 필요한 도구다. 하지만 이러한 편리함을 취하는 대신에 잃는 것이 있다. 개념 그 자체는 폭력적이지 않지만, 서로 다른 개별자들을 동일한 것으로 인식하는 원리가 어느 순간 각각의 대상이 지닌 고유한 차이를 무시하는 근거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니 ‘이토록 다른 너’에 대해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예술가가 개념의 규정성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 내가 한번 ‘산’이라고 부른 뒤에 아무런 반성 없이 그 대상을 완전히 파악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본질에서 한참 멀어지는 것이다. 그 대상을 온전히 그 자체로 만나지 못하고 그저 내 생활의 도구로 여기기 때문이다. 내가 그 덩어리를 ‘산’이라 부를 때, 그것은 나의 주관적인 결정일 뿐이다. 내가 그렇게 부르는 것과 관계없이, 그 덩어리는 그것 자체의 풍부함으로 부풀어오르며 사방으로 넘쳐 흐른다. 그것은 생생한 흐름이고 운동이다. 나는 그것을 어떤 틀에 영원히 가둘 수 없다. 고정할 수 없다. 그것은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일그러지고 일렁이며 부유한다. 안수인의 그림에서 정체불명의 덩어리가 서서히 화면 밖으로 빠져나가듯이. 이런 대상의 불가사의한 속성을 (개념의 규정성에 저항하는) 불규정성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인간인 이상, 낯선 대상에 개념을 부여하고 분류하는 행위를 멈출 수는 없다. 그래도 최대한 반성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어쩌면 안수인의 작업이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작가는 “너는 산이다.”라고 말하는 대신에 “나는 너를 산이라 부르기로 했다.”라고 말한다. 두 문장의 차이가 느껴지는가? 후자는 전자에 비해 덜 규정적이고 덜 확정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관계 지향적이다. 우선 ‘너는 산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어야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또한 너를 산이라고 부르는 주체가 ‘나’임을 선언하는 것은, 너와 관계 맺기 위해 내가 가진 주관적 인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들어가겠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작가가 그 덩어리를 산이라 부르기로 한 결정에서 우리는 어떤 결연함도 느낄 수 있다. 타자에게 이름 붙이고 호명하는 행위는 언제나 불완전한 인식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이해하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안수인에게 그림은 인식의 과정이며, 그가 작업을 이어 간다는 것은 타자를 계속 궁금해하고 세상과 관계 맺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 여정은 완결되지 않기에 화면 자체가 계속 열려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왜 하필 산일까? 일반적인 사물이나 사람도 온전히 인식하기 어려울 수 있는데 왜 산을 주제로 삼았을까? 나는 작가의 선택이 굉장히 직관적일 뿐만 아니라 작가의 문제의식을 공유하기에 좋은 접근이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산이 대표하는 각종 자연물들은 인간 이성의 한계를 계속 시험하는 대상들이기 때문이다. 자연 대상들은 단번에 규모를 파악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크기로 다가오거나, 어디부터 어디까지 경계인지 분명히 알 수 없을 때가 많다. 심지어 바다인지 하늘인지 산인지조차 구분이 안 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우리를 헷갈리게 만드는 것 중에 대표적인 것이 자연이다. 인식 가능한 범위를 넘어서는 자연을 직면할 때, 우리는 약간의 불편함과 이상야릇한 쾌감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안수인의 그림을 보면서 느끼는 양가적인 감정도 이와 비슷한 구조로 작동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손쉽게 틀 짓기 어려운 대상이자 끊임없이 변화하는 대상인 자연이 개념으로 완전히 포착할 수 없는 삶의 다종다양함을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소재였다고 본다.
이렇게 개념의 한계를 인지한 채, 개념 밖으로 흘러 넘치는 대상들에 대해 탐구하는 과정은 시를 짓는 과정과 닮았다. 안수인의 작업에 붙은 제목들이 하나같이 시구처럼 보이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대부분 시인들이 쓰는 말들은 일상적인 말이다. 시에 쓰인 말 중에 우리가 정말로 처음 보는 단어들은 많지 않다. 아무리 난해한 현대시라고 해도 일단 열어 보면 우리가 아는 단어들이다. 다만 그 단어들끼리 연결되는 방식이 독특할 뿐이다. 완전히 논리적이지는 않은 연결을 따라가면서, 독자는 평소에 그 단어를 쓸 때 경험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자기 안의 힘을 느낀다. 이 힘이 바로 상상력이다. 본래 규정된 의미가 아닌 의미로 소통되는 시어들을 통해 자유 연상이 일어나고, 계속해서 심상이 미끄러지면서 언어로 포섭되지 않는 무엇이 존재감을 드러낸다. 안수인은 이렇게 시를 짓는 감각으로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에 어울리는 시적인 제목을 붙여 나간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친숙한 대상들을 다른 시공간에 옮겨 놓고, 우리가 흔히 가져다 붙이는 맥락과는 다른 맥락에서 그 대상을 바라볼 수 있게끔 유도한다. 이게 무엇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는 없지만 -그 덩어리를 산이라 부르기로 했음에도 정말로 산인지 알 수 없지만- 개념으로 완전히 규정되지 않는 틈을 열어 주면서 약간의 엉뚱함과 자유스러움을 느끼게 해 준다.
안수인은 이전 작업에서는 내가 뭘 그리는지가 중요했지만 최근의 작업에서는 대상보다는 그 대상이 놓인 공간이 더 중요해졌다고 말한다. 이 말을 달리 해석하면 관계적인 맥락에 대한 이야기로 읽힌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본다. 내가 너를 ‘산’이라 부르기로 했을 때, 너라는 덩어리가 놓이게 되는 장소는 나의 내면이다. 여기서 너는 그저 복잡한 덩어리가 아니라 ‘산’이 된다. 산이라고 단정짓기에 너는 너무 변화무쌍하고 다채롭고 모호하지만, 나는 너를 ‘산’이라 부르고 싶고 너를 이해하고 싶다. 어쩌면 너는, 내가 아닌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다른 무엇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항상 같지 않은 너와 함께하기를 바란다. 안수인의 그림은 이 마음이 움직여 간 궤적이다.